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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치유에 대한 비판적 팡세(Pensées)

by sallyheim 2024. 1. 24.

 

복과 치유(Healing)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행복과 치유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과 치유의 일반적인 의미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일상사진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는 만족감에서 강렬한 기쁨에 이르는 모든 감정 상태를 특정 짓는 안녕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는 표현은 만족감이라는 충만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만족감=충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자신의 마음에 흡족할 만한 것들의 상당수는 우리의 심리구조 내에 욕구(Desire)로 일컬어지는 충동(impulses)”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충동은 쉬운 말로 흔적(stigm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흔적을 정신분석학자들은 주로 콤플렉스(complex)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리비도(libido), 칼 융(Carl G. Jung)은 그림자(shadow),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열등감(inferiority)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정신병리학에서는 흔히 외상(trauma)이라고 하며, 가족요법에서는 해결되지 않고 여러 세대에 걸쳐 형성된 관습이라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마음에 흡족할 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행복에 대한 느낌은 자기 안에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주로 부정적인, 흔적들이 잠시 해결되었다 혹은 어루만져졌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행복은 쟁취해 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쟁취해 내야 할 행복은 다른 이와 나눌만한 것이 아닙니다. 탐욕과도 같은 행복에의 갈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침몰을 경험하게 합니다. 쟁취하듯 얻은 행복은 잠시 황홀경에 빠진 듯 만족감과 충족감, 충만감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또 다른 허탈감에 빠지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느낌을 갖는 순간 또 다른 것을 성취하고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시고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습니다.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그의 글, “The Endangered Self”에서 무엇인가 추구해야 한다는 과도한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험에 빠진 자기(Endangered self)”로 규정하며 이의 직접적 원인으로 부모들의 과잉보호를 지적하였습니다. 응석받이로 자라난 아이들의 심리는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아상을 갖게 되며 이는 결국 자신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행복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오히려 만족감이라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느껴지는 찰나적 기쁨에 의해 나타나는 안녕의 상태가 아니라 만족감 추구의 심리역동과 전혀 다른 "평안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안의 상태"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요? 

 

돈, 명예, 건강 등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떠올려 봐야 하는 필수적인 단어가 바로 치유입니다. 행복과 치유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치유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행복과 치유라는 두 주제가 하나의 비평적 관점에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단어가 가진 일반적 생각이 편견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에 대한 불만"입니다. 행복을 만족감 추구로 생각하는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생각은 만족감으로 즐거워하는 자신의 미래를 그리는 "환상"입니다. 여기서 꿈이나 비전으로 표현하지 않고 "환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해결할 길 없이 늘 추구해야 하는 갈증과도 같은 심리적 "욕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현재는 늘 불만입니다. 도대체 행복하지 않다고 불평을 합니다. 아니면 반대로 이 불평이 숨겨져 있거나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억눌려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느끼지 못하기도 하며, 느낀다 하더라도 내일을 꿈꾸며 현재를 극복하자고 자신을 재촉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옭아맬수록, 지금 당장엔 현재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표면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고 내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날이 오면, "느닷없이" 현재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흡사한 심리적 역동이 치유에서도 일어납니다. 

 

치유의 사전적 의미는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함"이라는 말입니다. 병이 나거나 가난하여 궁핍하고 어려운 상황에서의 고통과 절망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조금 더 지혜를 가지고 찬찬히 치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의문을 가져 봅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행히도 치유를 치료의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더 나은 삶으로의 전환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체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현재를 회피하거나 극복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때 치유를 떠올립니다. 이러한 치유에 대한 자연스러운 생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느끼는 일종의 생(生)에 대한 본능일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자아(ego)가 갖게 되는 일종의 대처방안으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 억압, 회피, 대치, 승화 등)나 조크(joke), 유머(humor) 등을 언급하며, 치유에 대한 갈망을 현실의 부정적인 느낌에 대한 자아의 회피 대처로 해석합니다.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행복에 갈증을 느끼듯, 현재에 대한 부정적 느낌에 대한 자아의 회피 반응으로 치유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을 바꾸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치유를 갈망하게 되는 우리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치유의 중요성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치유를 추구해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치유에 대한 인식론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치유를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시간의 개념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치유라는 상(像)이 지향하는 시점은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입니다. 고장 난 라디오를 원상태로 복구시키고자 노력하는 식의 과거 지향적이거나, 혹은 병든 상태에서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는 미래지향적인 개념으로 치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현재"의 시점은 왜곡되거나 상실됩니다. 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현재에 대한 불만이 있습니다. 지금이 싫다는 것이며, 불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변화가 필요하며 새로운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극심한 통증과 아픔, 괴로움과 실패의 쓴 맛이 가득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현재는 너무나 가혹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 현재에 대한 무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비판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현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 나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거나, 더 나은 미래를 꿈꾸자는 염원을 가진 것이니, 현재를 부정하기 위해 치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현재"라는 개념은 폄하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사랑에 대한 병리적 고집

 

치유를 과거 지향적이거나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를 사랑함 때문입니다. 자기의 현 상태를 개선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고집스러운 환상이 있습니다. 하인즈 코헛은 이러한 자기에 대한 개념을 거대자기(The grandiose self)라고 불렀습니다.  이 고집스러운 환상이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일 수는 없어." "이건 내가 아니야." "뭔가 변화가 필요해, " 이러한 불만은 자기 변화에 대한 충동을 자극하게 되고 무엇인가 변화를 추구하는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자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기에 대한 내적인 환상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자기, 즉 거짓자기(False self)에 대한 탐닉이며 자기도취(Narcissism)인 것입니다. 그래서 병리적인 것입니다. 

 

알프레는 아들러(Alfred Adler)는 자기에 대한 도취가 마음이라는 심리구조에 흔적(stigma), 즉 고정관념(complex)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숙제처럼 마음에 남겨진 상처(trauma), 즉, "열등감(inferiority)"이 우월감(superiority)을 추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열등감이란 콤플렉스엔 "상실"이 존재합니다. 상실이라고 부르는 심리적 역동을 이끄는 중요한 내적 동기는 자기 감 혹은 자존감 상실에 대한 "불안(anxiety)"입니다. 결국 자존감 상실에 대한 염려가 열등감을 부추긴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감과 "내가 존재할만하다"라는 자가 가치감이 자존감인데, 이것의 상실 때문에 치유 추구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를 추구할 때 정말 자존감이 회복되는 것일까요? 

 

치유를 추구할 때 자존감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치유 추구에 대한 집착이 커지면 커질수록 거대 자기로 포장된 거짓 자기에 대한 탐닉, 즉 자기도취에 허덕이는 자기애적 자기(Narcissistic self)가 형성되고 구체화되어 종내에는 자신의 인격과 개성, 삶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