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적 존재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치유가 된 사람은 현재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과연 실존적 존재로서의 치유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실존적 존재
실존적 존재란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우리가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실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치유가 현재와는 다른 삶을 살게 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은 우리로 우리 자신을 실존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때문에 "이 병만 나으면..." "이 상황만 벗어나면..." 끊임없이 현실을 도피하거나 이겨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병과 그 상황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접할 수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세계 내 존재"라는 실존적 인식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현실과 실존의 문제는 우리가 늘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 고통과 한숨, 쓰라린 경험과 아프디 아픈 삶과 실존을 부인하거나 회피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과 실존에 대한 잘못된 대체방법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현실과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를 직면하고 이해하며 수용하고 스스로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곧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 치유를 말하며 실존과 현재에 대한 감각을 배재시킨 채 치유를 추구하고자 집착한다면 "그런 치유는 필요 없다"라고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치유는 무엇인가를 성취하거나 이루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치유는 실존적이며 현재적입니다. 치유를 실존적이며 현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즉 "인간 한계에 대한 직면을 통한 자기 이해와 수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임을 직면한다는 것은 우리의 실체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실체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타나진 현상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안에 흐르는 어떤 정직하고 순수한 흐름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인간 욕구가 아닌 정직하고 지혜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우리 가족은 범고래들의 멋진 쇼를 보고 범고래에 대해 열광하는 팬이 되고 말았다. 그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포식자가 어떻게 조련사의 지시에 따라 점프하고 멋진 모습으로 묘기를 펼쳐 보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곧 어떻게 이 범고래들로 그렇게 즐거운 모습으로 멋지게 묘기를 펼칠 수 있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이 책이 주장하는 것은 칭찬을 통해 범고래를 더 잘 훈련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도구화된 칭찬이 칭찬이 될 수 있을까요? 칭찬의 본래적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칭찬은 칭찬받는 이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칭찬하는 이를 위한 것인가?" 당연히 칭찬의 본래적 모습은 칭찬받는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에서 칭찬은 누구를 위한 칭찬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범고래를 위한 칭찬이 아닌, 범고래들이 죽어라 애쓰는 쇼를 욕심에 찬 듯 기대하며 바라보는 저자 자신은 아니었을까요. 블랜차드는 자신의 서문에서 범고래들이 즐거운 모습으로 멋지게 묘기를 펼쳤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범고래들이 즐거웠을지 생각해 봅시다. 만약 칭찬을 통해 칭찬받는 이가 즐겁거나 기쁘지 않고 칭찬하는 이가 오히려 즐거워지고 기뻐진다면 그것은 칭찬을 가장한 기만인 것입니다. 결국 본래적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의도와 그 순수한 의도가 이끄는 여러 가지 모습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치유의 본질
치유는 고통받는 자신의 현실을 직면하며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정직하고 지혜롭게 자신을 수용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생물학적 질병과 상처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치유도 행복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과 실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기에 대한 현실적-실존적 바라봄"은 거짓 자기의 가면을 벗기고 참 자기를 바라보겠다는 용기인 것입니다. 추상적이거나 막연한 가운데 자기를 바라보며 거대 자기나 자기 탐닉에 빠져 치유를 추구할 것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바라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적으로 실존적으로 드러나는 자기에 대해 인정하고 수용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치유 추구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이것은 치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 자체로서 자기를 바라보며 자기의 유의미함을 인식하는 것이 치유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